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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잠 후에 

 

※ 오디세이x발할라 콜라보 스토리 기반/스포일러 포함 

※ 弱 발할라 코믹스 내용 포함 

 

1. 

  "아무래도 서로 대화가 필요할 것 같은데." 

  "좋아. 필요하다면."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취가 진동하는 교인들의 땅에서 줄곧. 잿빛 안개가 끼고, 해골들이 나뒹굴 고, 까마귀가 썩은 살점을 뜯어먹는… 두 전사의 조우로써는 더 할 나위가 없이 황홀한 장소지. 

  "그래서, '적', 이름이 뭐지?" 

 

  "에이보르." 

 

  알아.

 

  "나는 내 일족을 돌본다. 레이븐소프라는 정착지에서 말이지." 

 

  알아.

 

  "이 사람들은 너 때문에 날 공격하고 있어!" 

 

  알고 있다고. 

 

  "네가 여기 없었다면 아무도 날 죽이려고 하지 않았을 거야." 

 

  알아, 알고 있어. 

 

  축적된 열력은 상황을 쉽고 빠르게 타개하는 지혜와 기량을 선사하지만, 권태감과 염증 또한 수반한다. 뭐든지 다 경험 아래 있었다. 수상쩍다고 추궁을 당하는 것도, 전부 네가 초래한 사태라며 핍박과 멸시 를 받는 것도, 너만 아니었더라면 일사천리였을 거라는 말도. 카산드라를 온누리 그 누구보다도 이 같은 시체 밭과 막역하게 만든 근거들이었다. 엄밀히 '너만 아니었더라면'은 이쪽의 몫이라고 하고도 싶지만.

카산드라는 결국 내질렀다. "나도 알아, 안다고!" 

 

  그는 딱히 고전의 축에도 끼지 않는, 혼자서라면 시시껄렁하다고 여겼을 전투에서 내내 생리적인 불안 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골이 징징 울렸다. 단언컨대 애수는 아니지만, 어쩌면 그와 비슷한 원리로 간장 肝腸이 울렁거려 호흡이 힘겨웠다. 

 

  "내 존재가 유물을 작동시킨다고 정직하게 말해야 했어. 미안해." 

 

  어딜 가나 역겨운 피 냄새를 몰고 다니지. 번성하던 산천초목마저 잿더미로 만들어버려… 평화와 행복을  창 끝으로 횅 거둬가버리고, 대신 끊이지 않을 통곡과 비애를 파종하고 다니지. 

 

  뇌리에서 남녀노소를 갈마드는 정체 모를 악담이 줄지어 메아리 쳤다. 카산드라는 그것을 제 목소리로 덮었다. 

 

  "하지만 날 믿어. 일단 유물에 도달하면 내 도움이 필요할 거야. 이 사람들은 유물의 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날 믿으라'는 말을 하루 동안 몇 번 반복한 거지? 정작 자신도 타인을 잘 믿지 못하면서. 그래서 홀로 지내고, 이마저 말을 섞은 것도 기적이라 치부하면서. 앙 다문 손아귀에 신뢰를 쥐여주겠답시고 손톱 밑 을 바늘로 쏘삭거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누구라도 의심할 상황이었다. 카산드라가 에이보르였다면, 진즉 한 번 더 도끼날을 들이밀었을지도 모른다. 믿고 싶더라도 그래야만 했을 터였다. 

 

  에이보르는 아니나 다를까 한숨을 푹푹 쉬어댔다. "도저히 널 떼어 놓을 수가 없다는 거지, 안 그래?" 야 생에서 온갖 고초와 수난을 겪고 잔뜩 독이 오른 맹수 같은 어조였다. 탐탁지 않을 때 괜스레 그르렁거 리는 에이보르의 버릇은 카산드라에겐 흥미로 다가왔다. 뭐든지 티를 내야 직성이 풀리는 건가? 

에이보르는 끝없이 의심하고, 불안해했다. 그렇지만 카산드라는 그에 더하면 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표출하지 않았을 뿐. "걱정하지 마. 내가 점점 더 좋아질 거야." 이러한 형편 좋은 소리는 일단 에이보르 를 진정시키기 위한 억지에 불과했다. 

 

  에이보르는 역시 심기에 거슬렸는지 또 한 번 그르렁거렸다. 발걸음에 필요 이상으로 힘이 실려 있었다. 도끼 자루를 쥔 손에도 핏줄이 바짝 서 있었고. 그렇지만 가타부타 말은 더 얹지 않는 것이 그가 답도 없는 독종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어쨌든 그는 공식적인 감투만 없을 뿐, 사실상 한 일족을 이끄는 지도자였다. 묵묵히 동분서주하며 장치를 맞추는 에이보르의 등을 바라보며 카산드라는 달콤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문이 열릴 때, 카산드라는 에이보르의 입이 떡 벌어지는 모습을 기대했다. 저 또한 처음에는 그 랬으니. 그러나 에이보르는 생각보다 차분한 태도로 통로를 거닐었다. 의아에 빠지는 것은 부러 그의 뒤 를 따르며 모습을 살피던 카산드라였다.

 

  "내 땅의 물건이야."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방패, 창, 장신구들. 익숙하기 그지 없는 양식의 사물들이 즐 비해 있었다. 이제 기억에는 없지만 아마 한 번쯤 다 손에 넣어본 적 있는 것들일 터였다. 지금도 손 위 에 놓인다면 마치 제 것처럼 일말의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파도처럼 엄습하는 병사들의 노호가 소리 없이 그의 귓가를 감쌌다. 제각각 투구와 올빼미가 그려진 두 개의 기치 아래 서로를 향해 질주하 는 전사들의 동작이 그려졌다. 허나 이제는 전부 수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골동품에 다름 아니었다. 카산드라는 나지막이 일렀다. "유물 때문에 생긴 환상이야." 

  이번 유물은 제 추적꾼이 누구인지 지나치게 잘 알고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환영인 건 알고 있지만, 여기 있는 물건들은 내… 내…" 

 

  "고향?" 

 

  "내게 고향은 없다. 더 이상은 없지." 

 

  미련은 뿌리부터 들어내야 한다. 그러나 카산드라는 하릴없이 무너지고야 말았다.

 

  "그럴 리가 없어… 포이베." 

 

  한 소녀 앞에서는 언제고 그렇게 될 터였다. 

 

2.

 

  여자는 개고생의 끝단이 지척까지 다가왔는데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일어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뭔진 모르겠지만, 방금 읊조린 이름과 그 독수리 조각상이 대단한 연관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때론 장식 품 하나가 한 사람의 오욕칠정을 대변하기도 하니까. 기실 다사다난했던 한나절 중 여자가 그토록 경건 하게 구는 것이 처음이었으므로 지켜보는 에이보르마저 덩달아 열이 식었다. 마치 제 신을 모시는 듯한…, 절대 깨트려서는 안 되겠다는 사명감을 유발하는 엄숙한 광경. 여하간 고지가 코앞이었다. 이걸 손에 넣으면 드디어 돌아갈 수 있다. 이걸 손에 넣으면… 몸이 근질거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에이보르는 구형 앞에 섰다. 

  더 대단한 외형을 상상했었다. 이계의 것처럼 빛이 나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기이한 소리가 난다는 것 외에는 그리 특출날 것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몇 년 전, 한창 좁디좁은 스타방에르 부지를 활보하며 스 튀르비요른의 수양딸로 취급받던 어느 날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아무런 연관 없는 기억이 어째서 지 금 같은 때에? 의문하자 마치 필사본과 원본이 씐 양피지 두 장을 하나로 포개듯 각기 다른 장면이 하 나로 겹쳐졌다.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기이한 구형 장치. 기하학적인 문양이 음각된…. 깊은 곳에서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으나, 당장 이것을 거둬 습득할 해방감이 그것을 압도했다. 더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에이보르는 손을 뻗었다. 

  "…우리가 사라진 후에도 그 피를 섬기리라…"

 

  그 순간 에이보르의 부름은 그저 살기 위한 것이었다. "카산드라!" 

 

  무기다, 위험하다, 환각에 빠진 인간들은 그것에 비할 바가 안 된다는 여자의 경고는 허투가 아니었다. 어느 모로 보나 진이 완벽히 빠져나간 에이보르는 상태를 감추기 위해 재차 너스레를 떨었다. "고작 이 거 때문에 그렇게 고생한 거야?" 

 

  카산드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이 퍽 어여뻐하는 투였다. 조금 우쭐해진 에이보르는 선심 쓰듯 건넸다. "네가 가져." 

 

3.

 

  "잠깐. 승리를 축하하는 건 노르드의 풍습이지. 그리고 결과적으로, 네가 도움이 되긴 했으니까… 같이 한잔하러 가는 건 어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앙알대더라니, 이별은 아쉬웠을까. 엷게 상기된 에이보르의 얼굴은 영락없이 명성과 성취에 도취된 애송이의 그것이었다. 안 그래도 카산드라는 에이보르를 '꼬마'라고 부르고 있던 참이었 다. 외부로 표출했다가는 또 으르렁댈 게 뻔해 생각에 그쳤지만. 

 

  꼬마는 카산드라를 계속해서 설득했다. 

 

  "전부 취한다면, 아무도 네가 여기 있는지 모를 거다." 

 

  거칠고, 툴툴거리고, 어설프고, 서투르고… 어릴 적부터 반복된 수난과 협잡의 방증이겠지. 하지만 별 수 없이 티가 났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난 티가. 

 

  "즐겁게 보낸다면 내일 네 머리가 아픈 것 정도뿐이겠지." 

 

  피로연에 참석해 사람들과 부대끼며 논다고? 에이보르 딴엔 그것이 최적의 휴식 방법이라 여겨 권하는 것일 터이나, 애석하게도 카산드라의 견해와는 판이했다. 전투 방식, 가치관에 이어 여독 해소 수단마저 둘을 별종으로 갈라놓는 가름쇠가 됐다. 

  그러니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카산드라로서도 다분히 충동적인 일이었던 셈이다. 

해종일 너무도 긴 시간을 타인과 함께 있었다. 카산드라는 에이보르와 헤어지자마자 안도의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에게 분리란 필수불가결한 사항이었다. 누군가의 곁에서 지팡이와 대화를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알레테이아. 유물을 회수했어요." 

 

  -잘 됐구나. 수호자. 그와 신뢰가 쌓인 모양이로구나. 

 

  "네. 녀석이 믿어줘서 다행이에요. 제 딴엔 울며 겨자먹기인 것 같긴 했지만." 

 

  약속 장소까지는 생각보다 거리가 있었다. 녀석도 일찍 도착하지는 못할 터였다. 재차 여로에 오르기 전 한적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안일함과 낯선 환경으로의 기대감이 낱장 단위로 교차했다. 어쩐지 맥이 어류의 아가미처럼 벌렁거려 말고삐를 잡은 손에 땀이 찼다. 아무리 그래도 이상한 일이었다. 알레테이 아와 유물에 관해 대화하는 것이 이토록 아늑한 일이었다니. 무상하다면 몰라도. 과업의 수용과 애호는 별개의 일이었고, 개중 후자는 여즉 손에 꼽은 탓이었다. 

 

  알레테이아와의 관계는 매우 유순해진 축에 속했다.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격언의 범주는 심지어 지팡이 와 인간 사이에까지 달했다. 사실상 그들은 알레테이아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계약 관계였다. 그러나 한 행성의 극과 극을 넘으며 생사고락을 함께 한 지도 벌써 천 년이 넘었다. 카산드라가 제 과업에 엄숙한 사명감을 지니게 됨과 더불어 농담조차 거의 통하지 않았던 알레테이아의 폐쇄성도 많이 누그러졌다. 배후에 세월을 거느린 유일한 동반자로서 카산드라 쪽에서는 그럭저럭 애착이라 부를 만한 것을 지니고 도 있다. 상대편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임무 하나를 또 완수했으므로 한시름 덜은 직후의 대화는 늘 상쾌했고, 알레테이아도 너그러운 태도를 유지했다. 허나 그런 범연한 대화에서 본연의 냉철함을 발 견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요구되지 않았다. 

 

  "아직… 시간을 조금 더 주세요. 녀석이 절 초대했거든요. 그런 얼굴을 보면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요. 공감하실진 모르겠지만." 

 

  카산드라의 말 끝에는 은근한 빈정거림이 섞여 있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알레테이아는 지금 당장 조급할 것은 없으나, 결코 해이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돌아가야만 한다. 그걸 유념하도록. 

 

  "……예." 

 

  '돌아가야만 한다.' 카산드라는 그 말을 여러 번 되새기며 말 고삐를 틀었다. 

 

  카산드라는 처음 대지를 밟아본 망아지처럼 어성버성했다. 

 

  땅바닥을 기고, 수액을 빨아먹고, 털로 뒤덮여 사족 보행하는 동물들이 아니었다. 분명한 언어로 의사소 통을 하고, 춤을 추고, 시까지 읊는 격조 높은 피조물들이 수십이 넘게 한 데 뒤섞여 있었다. 그들이 분 비하는 눅눅한 열기가 폐부를 꾹꾹 짓눌렀다. 옹기종기 뱉어 모은 타액으로 주조된 꿀빛 효모가 서로를 융합하는 실타래가 되는 곳. 귀부인들의 장신구, 전사들의 전리품, 횃대의 일렬횡대가 몽롱한 망향병을 유발하는 곳. 

 

  카산드라는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여기에 오래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작지 않은 공간에는 수많은 위험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쩌면 암흑만이 유일한 승리자인 심야의 밀림 속보다 더욱더. 차라리 불문 곡직의 자연을 상대하는 것이 훨씬 안락했다. 다짜고짜 생면의 손을 잡고 춤을 추려드는 취객과 나뭇 바닥에 침을 뱉고 배설하고 토하며 전혀 행실을 사리지 않는 자들. 토르처럼 웃고 술잔에 손발가락을 빠트리고 씨름판을 벌이면서 각자의 서사시를 착실하게 써 내려가는 사람들. 지나치게 살갑고 사람다운 풍경이었다. 이 시간, 이 공간 안에서만은 그 누구도 체면치레 따윈 필요 없었다. 모든 것이 윤허될 것이 다. 도처에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다. 지독하게 유혹적인, 사람 냄새……. 

  "혼자 들어가는 것처럼 말하지 마. 내가 같이 있잖아." 

 

  에이보르의 말은 과연 듬직하기 그지 없었으나, 정말 카산드라의 심정을 이해했을지는 미지수였다. 어차 피 카산드라 또한 그런 별세계의 이야기는 바라지도 않았다. 카산드라는 분위기에 녹아들어 가는 듯 유 희를 거들면서도 그 말만을 되풀이 했다. '사는 세계가 너무 달라.' 

 

  꼬마는 유물 획득을 기점으로 완벽히 방어를 해제했는지, 그 마른 빵 부스러기 같은 목소리로 곁에서 쫑알쫑알 제 무용담을 읊어댔다. 이 가죽은 지난 가을 사냥에서 잡은 늑대의 것인데, 같이 사냥 간 사람 들이 열 발을 쏴서 서너 발을 겨우 맞추었다면 자기는 백발백중이었다고. 다음 봄에는 욤스바이킹들을 고용해서 습격에 나설 것이라고. 수도승 놈들은 뭘 그리 꿍쳐놓는지 늘 자원이 넘쳐난다고. 안 그래도 마을에 옥타비안이라는 로마 유물 수집가가 있는데, 너를 보다 보니 그자가 생각이 난다고, 혹시 그자를 아느냐고…. 두서는 실종했고, 맥락은 널을 뛰었다.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곳에 언제까지 있을 것 인가를 계산해보고 있던 카산드라는 맨 마지막의 '유물'이라는 단어에 속절없이 이끌렸다. 그리곤 금방 이수와 하등 관계없는 인간들의 작품에 불과하단 것이 드러나자 슬쩍 웃어 넘겼다. 당연한 것을. 이제 카산드라의 사전에 완전한 휴식이란 없는 단어였다. 

 

  어느새 둘의 관계는 처음과 거의 완벽하게 역전되어 있었다. 도중까지는 카산드라가 에이보르의 빗장을 해제하려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면, 막간에 다다라서는 에이보르가 카산드라의 문에 발길질을 하고 있었 다. 카산드라는 거듭 주의했다. 바람처럼 왔다 갈 존재로 남게끔. 동안이란 소리를 많이 듣는다느니, 유 물 찾는 일엔 도가 텄다느니, 홀로 '여행'중이라느니… 그 누가 몇 천 년 동안 늙지도 죽지도 않는 불로불사를 그리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왜, 그간 일으킨 말썽들에 비하면 이번 건 말썽 축에도 안 낀다고, 오대양을 통합해도 제가 흘린 피의 총량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그런 말로 저 쫑알거리는 하룻강아지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지 그래? ―그렇게 생각한 것이 화근이었다. 단단히 사수했다 여겼는데, 바닷물에 도료처럼 풀어헤쳐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천 년 동안 이 정도로 술 취한 적은 없었는데." 

 

  순간 전신의 혈액이 다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다행히 꼬마는 신소리로 치부하곤 이국의 욕설을 배우 는 데에 열중했다. 카산드라는 모두가 고의로 자신을 내려놓는 공간에서, 자가 단속에 여념이 없었다.

 

4.

 

  에이보르는 단지 제 공동체를 수호하는 과정에서 만난 기변이라고 여길 테지만, 엄밀히 이것은 운명이 었다. 누군가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철저하게 배합하고 설계해둔 하나의 단상. 둘은 붙잡혀온 배우들 이었고. 은폐는 완벽했고, 비밀은 보존되었다. 작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더불어 미적지근 했다. 설령 카산 드라가 천 년에 관한 말실수를 더 늘어놓았단들, 유물이 어떻니 이수가 어떻니 전부 발설해버렸단들 일 말의 변화도 없었을 것이다. 에이보르는 밥상머리를 치며 박장대소 했을지도 모른다. 전래 동화 들을 나이는 지났다고. 

  에이보르에게는 무모함이 있다. 티 묻지 않은 설산 같은 순수함이. 정작 본인은 모르는 것 같았지만. 

 

  "내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강한 건 아무것도 없어. 게다가, 나는 이 '무기'를 너보다 잘 사용할 자신이 있다." 

 

  그런 기고만장함을 맞닥뜨렸을 때는 적이 울화통도 터졌지만 막상 거리를 두고 보니 그만한 유희도 없 었다. 그저 제 성미를 못 견딘 에이보르의 허풍에 진배 없었지만, 카산드라는 그 말을 두고두고 쏠쏠한 요깃거리로 쓸 요량이었다. 이런 것이 필요했다. 빡빡하게 경직돼버린 심신의 근막을 부드럽게 풀어줄 추억거리가…. 

 

  에이보르의 '무기'는 먼저 온 자들이 흘린 기계 장치 따위가 아님은 물론, 아직 그 자신조차 모르는 혈 통도, 그에 따르는 힘도 아니었다. 다름 아닌 무지가 그의 무기였다. 안하무인에, 적반하장에. 그래서 가 능한 것들. 아니, 그런 시절이 가능케 만들어주는 것들. 늘어놓으면 한 뼘도 안 될 작달만한 세월의 부피 가 그를 용서하는 것들. 인간에게는 저마다의 분수라는 것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이상을 기원하는 자는 필시 해를 입지. 카산드라는 그렇게 자멸한 자들을 아주 많이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 아이와 밀접한 관 계가 있을지도 모르는 태고의 한 노인 또한 거기에 속했다. 변용하자면, 차라리 멸하지도 못하고 그저 신세만 망친 이는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카산드라는 아주 좋은 예시로서 입술 안을 살짝 깨어 물었다. 

 

  밤은 지속될 것이다. 아마 일출을 보고서도 제게만 보이는 환영인지, 실제인지 분간도 못 할 무지렁이도 파다하겠지. 밤의 솔기를 부여잡고 서로 사랑이라 착각하는 우매함도 만연하겠지. 이마에 똑 떨어지는 아침 이슬에서야 해방되겠지. 어쩌면 천재지변 같은 실수가 뜻밖의 행복을 불러다 주기도 할 테지만, 그 반대가 더 많을 것이고. 애써 준비한 정찬이 채 식기도 전에 카산드라는 또 다른 사지로 빠져 나왔다. 제가 남들을 해칠 수 없는 곳으로. 오로지 자신만이 스스로를 망칠 수 있는 곳으로. 피차 얽히지 않는 것이 신상에 이로웠다. 가까이 다가갈 수록 얻는 것은 고통 뿐인 지라. 

  그러므로 이번엔 좀 쉬엄쉬엄 끝난 편이었다. 마무리도 깔끔했다. 잔치로 끝을 맺는 사례는 손에 꼽았으 니까. 본래 시작이 좋지 못하면 끝까지 동일했다. 무수히 선택을 강요 당하고, 그것은 길든 짧든 어떤 형태로나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폐해는 상호의 성질을 띠고 있었으므로 카산드라에게도 상흔 이 남았다. 아픈 전적들을 의식하면 좀 나아질 거라 여겼으나 결과는 항상 대동소이 했다. 무수한 협작 과 잠적, 그리고 사별. 항상 그들은 너무 빨랐고 카산드라는 너무 느렸다. 카산드라가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눈 깜짝할 새에 시야를 벗어났다. 판이한 유속이 공존을 불능케 했다. 그래서 카산드라는 이렇게 살기로 정했다. 타인들과 일정한 간극을 두고 지내면서 관계가 궤도에 오를 즈음 자취도 없이 떠나버리 는 것은 다소 비겁하더라도 매사에 대단한 보탬이 됐다. 면피해서 거머쥐는 안식이란 없다고, 그걸 알고 있었는데도. 

 

  에이보르와의 동행은 그것을 재확인하는 좋은 계기가 됐다. 카산드라는 짐짓 여유의 가면을 쓰고 속으 로 발만 동동 굴렀다. 내가 너를 수렁으로 끌어들이는 불빛이 되면 어떡하지. 제가 불나방인 줄도 모르 는 너는 너를 기꺼이 공헌할 텐데. 에이보르가 경거망동할 때마다 너머에는 주검을 떠안고 통증을 호소 하는 카산드라의 환영들이 있었다. 다 끝난 지금에 이르러서야 몰래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이었다. 가랑잎처럼 찰나에 똑 하면 떨어지는 죽음들. 정해진 천수들. 본시 한 인간의 생사는 어찌할 수 없는 일로 단념하는 것이 마땅했으나, 카산드라는 그런 어찌할 수 없는 일들에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단지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었다. 카산드라에게는. 

  

  그렇기에 전지전능한 힘은 위험했다.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니까. 때문에 카산드라 가 단 한 번도 전능함을 바란 적이 없는 것이었다. 자신이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고 세상을 단숨에 멸망 으로 이끌 수 있는 고대 유물에도 끄떡 없는 힘의 소유자란 것을 알기도 전부터 쭉. 

 

  누군가를 너무 깊이 아는 것은 위험하고, 나를 노출하는 것은 위험하고, 사람에 둘러싸이는 것은 개중에 서도 제일이었다. 그의 악운은 사람의 수효와 비례했으며 불행은 전염병과 한 궤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온 생물들이 '죽음'이라는 이름의 새하얀 문턱을 향해서 각자의 방식으로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홀로 뒤처져 세상의 미아가 된 노인에게 주어진 것은 그런 것들이었다. 두려움, 공포, 취약함. 한창 때의 혈기 를 잃어버리고, 주저하고, 수치에 쉬이 정복 당하는 섬약함. 헌데 외양은 언제까지고 싱그럽고 말쑥한 모 습이라니. 그 괴리를 못 견디는 것이 저 자신뿐이라는 것마저 그에게는 또 하나의 비수였다. 그보다 더 결정적으로 그를 세상과 고립된 존재로 만드는 문장紋章도 없었다. 

 

  고립이란, 그 어감에서 오는 부정적인 기운 탓에 외면 당하기 쉽지만 의외로 장점이 매우 많다. 고요하 고, 그러므로 나의 내면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 타인의 의사를 사사건건 묻지 않아도 되고, 글러먹은 자와 밤낮으로 결론 없는 논증을 벌이지 않아도 된다. 양보도, 타협도 없이 시끄러운 잡음을 말끔히 소 거한 채 무엇이든 제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단점은 장점으로 꼽히는 것들을 거울에 비춘 모습이었다. 고요하고, 그러므로 나의 내면에 집중하게 된 다. 그것을 원치 않을 때도 그렇게 된다. 때로는 덫에 걸린 사람처럼 옴짝달싹을 못하고 진창에 빠진 것 처럼 허우적대야만 한다. 그렇게 아주 악랄하고 지리멸렬한 싸움이 된다. 다름 아닌 자기 자신과 그래야 만 한다는 점에서 더욱이. 내부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외부의 것보다 월등히 질이 나쁘다. 누명처럼 남들 에게 덮어씌울 수도 없으며 천 년 삶의 스쳐갔던 인연들처럼 무정하게 뚝 떼어 버릴 수 없고, 휴전을 선포하고 줄행랑을 쳐보았자 잠시 뿐 얼마 안 가 반드시 다시 찾아오게 마련이다. 다시 찾아왔을 땐 한번 침략 받았다 소생한 요새처럼 더욱 든든히 강화되어 있을 때도 있다. 고인 못과 고립된 사람은 별반 다르지 않다. 문드러지고, 악취가 나고, 검게 변색한다. 그것도 아주 깊숙한 곳에서부터. 

 

  이토록 장황한 넋두리가 그 증거다. 올려다보면 달은 휘영청 밝고 반딧불이가 황황히 그의 인도자가 되 어주는데, 그다지도 익숙한 풍경을 그만 낯이 설다고 느껴버렸다. 실은 더 취해 있고 싶다고, 떠나온 그 곳에 더 머물고 싶다고 욕심을 내비치게 만들었다. 맛을 본다는 것은 잔혹한 일이었다. 감히 영원을 바 란 것도 아니었는데, 찰나를 쥐여줬다 갈취해버리니까. 

 

  못이 정을 맞아 더욱 깊고 단단하게 내리 박히듯이, 쇠붙이가 담금질로 완벽해지듯이, 비 온 뒤에 땅이 굳듯이…… 그런 전도유망하고 희망적인 말들은 카산드라에게 해당하는 것들이 아니었다. 물론 그는 강해 졌다.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고, 얻었다. 동시에 오래된 것들이 으레 그렇듯 낡고, 닳았으며 해졌다. 생 명력을 지닌 존재들의 규율대로 지치기까지 했다. 이제는 미우나 고우나 벗으로 삼은 지팡이는 용케 그 런 삭막한 현실에 동행이 되어주었지만, 엄연히 그의 고행을 촉구하는 채찍질이기도 했다. 크고 무거운 것을 등에 지고, 채찍을 맞고, 피를 보고, 뙤약볕에 타들어가고, 약속된 종말을 향해 걸어간다―그것은 이제 시간에 따라 점차로 번성하며 기세를 널리 떨치고 있는 한 성인의 일생과 제법 유사한 지점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기억되었고, 카산드라는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영영. 

  그렇지만 누군가와 삶의 질량을 저울질하며 한숨만 푹푹 쉬는 것은, 망자에게 금은보화를 주렁주렁 달 아주는 것만큼이나 부질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 절박함에 매달리기엔 아직도 그 앞의 생이 너무 길었다. 

 

5.

 

  카산드라는 에이보르의 어린 면모들을 차례차례 곱씹었다. 그런 치기를 맞닥뜨린 것이 너무나도 오랜간 만이라, 당사자가 안다면 무안할 정도로 모든 장면들이 하나같이 선명했다. 수시로 분노하고, 작은 것에 도 약이 오르고, 타인과 차질을 빚으면서 제 내면을 불사르는 것. 그리고 제 안에 타오르는 것을 잘 조절하지도 못하지. 그것만큼 허황된 것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카산드라는 거기서 자신을 보았다. 소싯적의 저만큼 분노로 기동하는 사람도 없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기어이 에이보르의 유치함을 따랐을 땐 스스로 적잖이 놀랐다. "넌 너무 오만해! 에이보르. 그리고 그 때문에 파멸할 거야." 아직 그렇게 할 수 있는 여력이 남아 있는지 몰랐다. 

  에이보르는 이상하리만치 웃기도 잘 웃었다. 그 헤죽헤죽 은근한 만면이 전달하는 바가 많았다. 저 자신 을 피력하고 싶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호의를 전달하고 싶은, 그로 인해 동요를 유발하고 싶은. 헐거운 무장은 때로 좋은 연서가 된다. 아마 그 허여멀건한 모습이 그의 본연이겠지. 정직이란 대개 이로운 편 에 속하지만, 가끔은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를 때가 있어야 한다. 에이보르는 너무도 정직했다. 그러므로 카산드라는 발뺌했다. 둘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길은 그 뿐이었다. 카산드라는 천 년이 넘는 세월을 공 백으로 지냈다. 그 공백에는 무기가 있었고, 유물이 있었고, 과업이 있었고, 여하간 금속성의 무기물로 가득 차 그런 연약하고 알량한 것은 불온했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것들. 기껏해야 떨어져 나갈 비늘 조각들. 너무 따뜻하고 안일하고 뭉글거리니까, 그

런 존재는 주어진 경도에 따라 월등히 크고 무거운 것들에 의해 흔적도 없이 깔려 뭉개지겠지. 

네 눈에 내가 깃들면 안 되는데, 이 가소로운 비약이 나의 부끄러움으로 끝이 나야 할 텐데. 그 순진하고 앳된 미소가 계속해서 아른거렸다. 

 

  내일이면 그도 정착지로 돌아갈 터였다. 오늘의 무용담을 들려주면서 소소한 여흥에 젖겠지. 길지 않겠 지. 금세 일상의 거품 아래로 침식하겠지…. 

 

  밤에 타오르는 것은 낮의 그것보다 훨씬 쉽고 빠르지만 식는 것 또한 그만하다. 땅거미 나앉고 달이 차오르는 것만큼이나 이지러짐과 새 여명의 도래는 신속하다. 

 

  모든 것에는 근간을 따져 물을 수도 없는, 우리를 위해 마련되지 않은 강제적인 규율들이 대자연처럼 압도적인 힘으로 우리를 둘러싸매고 있다. 

 

  그 흉포한 권력 앞에서 자아를 뒤채고, 재간을 발휘하는 치열한 목숨들. 

 

  앞으로 그의 생애는 많은 선택의 기로에 놓일 터다. 까마귀 클랜의 에이보르, 그 이름이 바다와 대지를 넘어 풍류를 타고 카산드라의 귀에 당도하는 빈도만큼 그가 잘 살고 있다고 카산드라는 확신하게 될 것 이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에이보르는 쭉 그렇게 몰라야만 한다. 그에게 정해진 영역은 따로 있으니까. 

 

  시간의 더께에 파묻히겠지. 한풍에 예민한 장밋빛 뺨, 햇빛에 바싹 말려진 벼 이삭 같은 머리카락, 의기양양한 콧대와 대양처럼 망막하고 극광처럼 청명한 터키색 홍채, 강퍅하고 다부진 골상에 숨겨졌으나 시시때때로 하릴없이 드러나는 어린 날의 가느다란 첨예함, 그리고 그 속에 드러나는 순진무구함. 가린 들 가려지지 않고, 네가 막아도 빈틈으로 새어 나오는 요소들도. 모조리 크로노스가 그의 시퍼런 날로 베어가 버리겠지. 

 

  건조해지고, 생기를 잃고 색을 빼앗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너는 너를 잃어버리지는 않겠지. 명예, 위업, 보상, 주렁주렁 매달린 과실들이 몹시 탐이 나더라도 넌 결국 사람을 선택하겠지.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길에서 성장하고, 부흥하고, 번성하고 주어진 것들을 향유하다 스러지겠지. 

 

  그리고 나는 일말의 변동도 없이 똑같은 모습으로, 네가 만난 그날의 모습으로 너의 사후까지 길이길이 살아갈 것이었다. 

 

  그러면 다였다. 

 

  화로의 그을음과 어린 아이들의 박새 같은 지저귐과 펄펄 끓는 수프 냄새와 여가를 달래줄 시가 있다면. 군중의 불협화음과 발장구와 발을 덥혀주는 털북숭이들과 몇 장의 애정 어린 서신이 있다면. 과도한 지식과 재력, 힘 대신 넘치는 사랑이 거기 있다면. 

 

  그보다 더 원대한 것은 없을 것이고, 그 원대함을 아는 것만큼의 지혜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에이보르의 소유였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언젠가, 꼭. 

  에이보르의 꿈에는 카산드라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꿈이란 대개 무언가에 대한 심각한 압박이나 그리 움이 근원인데, 둘 사이에는 그럴싸한 계기도 없었으니까. 게다가 에이보르에겐 그 어마어마한 '혈통'도 있었다. 스카이 섬의 주민들이 통째로 악몽과 환각에 빠져 공포의 며칠을 보내는 동안 혼자 잘도 '땋은 머리의 여성'을 수소문하러 돌았을 정도로. 

 

  "말하는 게 마치… 도대체 몇 살이야?" 

 

  네 무지는 너의 축복이고, 너의 무기고. 

 

  "천 년이라고? 대체 무슨 말이야?" 

 

  꼬마가 저도 모르는 새에 휘두른 무기에 카산드라가 조금 통증을 호소하더라도, 그것 또한 카산드라의 것이었다. 양분할 수 없고, 양도할 수 없는 전적으로 그의 소유. 

 

  카산드라 또한 이 기억을 영영 간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멸망한 고대 그리스에서 태어났고 거기 서 자랐고 거기서 끝을 맺었으므로. 

 

  하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고작 이 하루를 우물처럼 긷고, 또 길어낼 것이다. 

 

6.

 

  그럴 수도 있었다 

 

  그들은 그럴 수도 있었다 

 

  형식의 테두리에서 삐져나와서 

  전투의 그림자에서 빗겨 나와서 

 

  사사롭게, 애틋하게, 은밀하게 

 

  같은 면적 안에 발을 포개어 얹을 수도 있었다 

  세월의 차폐막을 내려놓고 조금 더 많은 것을 헤아릴 수도 있었다 

 

  상흔을 손으로 세어볼 수도 있었고 

  주름의 깊이를 측량할 수도 있었고 

  골격의 윤곽을 더듬어볼 수도 있었고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들어줄 수는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그런 짐을 떠안았냐고 

  그럼 대체 어떤 기분이냐고 

 

  고독의 귀퉁이를 공유하고 

  비워진 술잔을 채우고 

  축적된 피로를 녹이고 

  책임의 무게를 덜면서 

  백해무익한 것들을 열거할 수도 있었고 

  마음의 구멍으로 회한을 흘렸을 테고 

  명분은 흐릿해지고 목적은 밀랍처럼 질질 샜을 테고 

  각자의 잇속만 챙기기가 힘들어졌을 테고 

 

  미련을 양분 삼은 나무가 하나 피어서 

  명패에는 '계륵' 글자가 씌어 있어서 

  둘을 대변했을 지도 몰랐다 

 

  돌봐줄 사람이 없이 

  버려지지도 못하고서는 

  시간의 범람만을 기다리면서 

 

  완벽이란 걸 몰랐던 시절로 

  영생이 가로놓이지 않았고 

  빗장이 없었고 

  운명은 서정적이었고 

 

  조금 더 무례했더라면 

  훨씬 몰인격했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러나 그들은 

 

  모두 허황된 꿈일 뿐인 게지 

7. 

  아직 다음 행선지는 확실히 정해진 것이 없었다.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것을 피하기 위해 무작정 배에 올라탄 것뿐.

혼자 쓰기엔 널널하고도 남는 배에 쭈그려 앉아 노를 저으며 카산드라는 이제 여백의 미를 즐겼다. 횃 대와 지팡이, 암살검, 그리고 육신. 

 

  "쓸쓸하겠어." 

  노를 쥔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바람과, 절그럭거리는 갑옷. 이따금 풍류에 어긋나는 칼날 소리가 허허하게 퍼졌다가 흩어졌다. 최소한의 여장으로 다님에도 남루한 배는 항상 삐걱거리면서 무겁다고 항 변했다. 이번에도 도중에 갈아타야 한다. 조각배로 망망대해를 건널 수는 없으므로. 높고 낮은 물살을 헤 치고 사람들의 물결을 제치고 시간을 가르며 나아가야만 한다. 기쁘고, 슬프고, 아프면서. 

 

  "기분이 어때?" 

 

  어떻긴. 

 

  에이보르는 모를 것이다. 

 

  "카산드라!" 

 

  찢어지는 고함에 허겁지겁 달려가 손을 포개었을 때 그 부름으로 그가 어떠한 사람으로 거듭났는 지를. 

 

  "언제부턴가 새로운 친구와 헤어질 그날이 슬퍼져." 

 

  '독수리를 거느린 자', '용병Misthios', '수호자' 화려한 이명들을 거느리고서 고작 친구라는 소박한 호칭에 얼마나 동요했는 지를. 

 

  또 앞으로 어떤 것을 맞닥뜨리게 될까. 어디를 가고, 누구를 만나게 될까. 막연한 기대가 카산드라의 마 음에 불씨를 지폈다. 그는 한계가 없는 수평선을 넘었다. 

 

8.

 

  다음날 아침, 에이보르는 진창 위에서 눈을 떴다. 돼지들의 울음 소리로 아침의 문을 열고 유골의 푹 꺼 진 눈구멍과 첫 인사를 나누었다. 무얼 하다 이까지 굴러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간밤 누구와 무엇을 했다 는 사실만은 뇌리에 똑똑히 남아 있었다. 시간을 가늠하기 위해 올려다 본 하늘은 해가 중천이었다. 

 

  "…정말 잊을 수 없는 하룻밤이었어." 

 

  깨질 것 같은 두통 가운데 뜨끈한 여운이 잠잠하게 번졌다. 이미 정식적인 아침과는 거리가 멀어졌음을 깨달은 그는 서둘러 귀환하기 위해 동료들을 일일이 찾아다녀야만 했다. 전부 저마다의 숙취로 다 똑같 이 신음하며 바닥에서 굴러 다니고 있었다. 회장 마룻바닥, 문 앞 흙바닥, 우거진 수풀 바닥. 돼지 우리 에서 눈을 뜬 것은 에이보르가 유일했다.

  채비를 마치고 롱 쉽에 올랐을 땐 이미 해가 벌써 서쪽으로 뉘엿뉘엿 기울어가고 있었다. 그러니 귀환 해서 융숭한 환대를 바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였다. 밤 보초의 환영 정돈 기대할 수 있을 지도. 너펄너펄 즐기는 것은 이쯤이면 자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지켜질 지는 확신할 수 없다. 뱃머리에 올라 선수상을 힘껏 그러쥔 채 풍향을 측정하고, 감각하며 에이보르는 이번 원정의 득과 실, 과정과 결과를 반추했다. 섬 도착 이후 내내 넋이 빠져 있다 돌아갈 때가 돼서야 사고가 명징해졌다. 굳 이 악몽 건이 아니고서도 저 섬은 원체 손바닥만 하고 사람들의 주업도 대개 농업과 어업 정도에 머물 러 있어 정착지에 큰 덕택으로써는 영 변변치 않은 것들 뿐이었다. 악몽을 몰아낸 보상으로 목재 몇 상 자와 물고기, 빵 따위를 몇 묶음 받기는 했다만 벼룩의 간을 빼먹는 꼴로, 에이보르의 물욕에는 한참 못 미쳤다. 사실 창을 하나 얻기는 했으나 이렇게 긴 무기는 아직 손에 익지 않았다. 한참 연습이 필요할 성싶었다. 

 

  에이보르는 제 앞에 펼쳐진 수평선과 연한 장밋빛 석양을 바라보며 이 시간대의 정착지의 풍경을 떠올 렸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드리워졌다. 손 쓸 도리 없이 흘러간 어릴 적 이후, 그가 직접 꾸린 생에 실失 은 없었다. 아직까지는. 앞으로도 그럴 수 있도록 더욱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번엔 비교 적 가벼운 상태로 돌아가게 됐지만, 다음엔 어마어마한 공물과 재보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여 장을 풀고, 짐을 다 옮기고 나서 다음 계획은 어찌할지 란드비와 상의부터 해야지. 서신이 왔다면 답장 을 해야겠지. 남은 동맹은 어디어디더라… 향후의 일들로 머리가 수선스러웠다. 에이보르의 안구가 설렘 과 야망으로 형형해졌다. 그는 호기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노를 더 힘차게 저어! 해 떨어지기 전까지 가는 걸 목표로 삼아보자고!" 곳곳에서 미쳤냐는 둥, 노도 안 젓는 게 큰 소리라는 둥 원정대의 볼멘소 리가 터져 나왔다. 에이보르는 제게 쏟아지는 비난들을 가볍게 무시한 채 발을 구르며 부츠 바닥에 고 인 모래를 떨어냈다. 저런 면박과 불평이 없더라면 과히 심심했을 것이다. 심심하기만 했을까, 몇 십 명 분의 일을 혼자 하느라고 진이 다 빠졌을 터였다. 이만큼 빨리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고, 막막했을 것이 고, 궁극적으로 무척이나 쓸쓸했겠지. 

 

  불현듯 작일 들었던 말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때때로 쓸쓸하기도 하지. 하지만 이 길은 내가 걸어야 하는 길이야." 그러자 동시다발적으로 그때와 결이 비슷한 장면들이 눈앞을 스쳤다. 옛 추억들 앞에서 무릎 꿇던 모습, '고향이 없다'면서도 고향 얘기를 할 때면 눈에 띄게 활기가 돌던 얼굴, 그리고 마지막 에 가겠다는 인사도 없이 묵언으로 저 멀찍이서 작별을 고하던 눈짓까지. 

 

  에이보르는 아마 오랫동안, 그 결연한 눈빛을 잊지 못할 것이다. 

 

  에이보르가 뜻하지 않게 함구했던 사실에 대해서 후회한 것은 그때였다. 늦어버렸지만… 그 땋은 머리의 전사에게, 아니 나의 친우 카산드라에게 전해줄 것을 그랬다고. 

 

  '이 세상에서 너 같은 빛깔을 가진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고 말이다.

 

9.

 

  레일라 핫산은 눈을 떴다. 맨 처음 마주한 것은 단연 웅웅거리는 기계와 오두막 천장이었다. 그는 금속 과 나무에서 바다의 짠내를 맡았다. 며칠을 햇빛을 보지 못한 피부는 백사장처럼 뜨끈하게 달구어져 있 었고, 바닷가 근처에도 가지 않은 손에는 소금기가 배어 있었다. 혼입 효과는 항상 지나치게 사실적이라 문제였다. 또 너무 오래 들어가 있었다. 혼곤해하는 것이 티가 났는지 션과 레베카가 달려와 그의 팔을 잡고 일으켜주기까지 했다. 약한 현기증이 일었다.

   

  션과 레베카는 자꾸만 되물었다. "괜찮아? 뭔가 이상이 있었던 거야?" 

 

  레일라는 아니라고 손을 휘저었다. 아니라고, 힘들지 않았다고. 단지 아주 좋은 꿈을 꾸었을 뿐이라고.

​-합작후기-

생애 첫 합작입니다. 몇 년 전 오디세이 발매때 열렸던 합작만 수없이 보고 또 보면서, 심지어 2013년에 열린 것까지 연어처럼 거슬러 올라가며 언제 다시 어크로 합작 열리는 걸 볼 수 있을까 눈물 짓던 차에 개최되어 엄청 기뻐요!!

발할라 발매 전부터 카산드라와 에이보르를 엮어댔지만 이렇게 1년도 더 지나서까지 파게 될 줄은 몰랐으며 심지어 콜라보 이후 딱 좋은 시기에 열린 합작에 이 둘로 뭔가를 써서 내리란 건 정말 총체적으로 상상치 못한 상황이라 아직도 얼떨떨하네요... 항상 현실에 놀라고, 기뻐하고, 흥분하고 그런답니다......

돌연 창궐한 전염병 탓에 밖에 나가지 못해서 흥미 본위로만 시작했던 게임에 이렇게 진심이 될 줄 그 누가 알았을까요......?

적어도 어크가 고티 타는 걸 볼 때까진 이 열정이 쭉 지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참여 할 수 있게 돼서 영광입니다~! 유비소프트 힘 줘라...!

발할라.png

부리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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